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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인문학=정동구락부는 조선 지식인들이 항일운동을 시작한 곳이다

정동구락부에 깃든 항일정신

아마츄어작업실 아산점 대표 김남순 | 기사입력 2021/08/04 [21:12]

커피인문학=정동구락부는 조선 지식인들이 항일운동을 시작한 곳이다

정동구락부에 깃든 항일정신

아마츄어작업실 아산점 대표 김남순 | 입력 : 2021/08/04 [21:12]

▲ 손탁호텔은 객실이 30칸에 달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호텔로 기록된다. 1층에 있던 레스토랑, ‘정동구락부’는 커피를 마시는 장소나 모임 이상의 뜻깊은 가치를 지닌다.  © 아산미래신문


일본에 대한 조선인의 저항의식이 싹트고, 애국계몽 인사들이 외교관, 선교사와 연대해 항일운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손탁호텔의 커피숍이며, 그 주체가 정동구락부다.


정동구락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을 규탄하는 한국 최초의 배일(排日) 정치단체로 전면에 나선다.

 

▲ 아마츄어작업실 아산점 대표 김남순, 교육전문강사, 아마츄어작업실 아산점, 충남 아산시 삼동로 45   © 아산미래신문

이 단체의 발족을 주도한 인물이 훗날 매국노가 되지만 당시엔 친미파로 분류된 이완용이다. '구락부'는'클럽'의 일본식 표기다. 미국과 프랑스의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대거 참여한 정동구락부는 일본에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을미사변 이후 친일정권에 포위된 고종황제를 궁궐 밖으로 탈출시키려 한 '춘생문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호응한 세력이 정동구락부다. 고종은 시종을 통해 정동구락부를 지원하면서 손탁이 운영하던 손탁호텔을 아지트로 활용케 했다.


정동구락부 회원들은 손탁호텔이 세워진 뒤엔 호텔 커피숍에 모여 구미 열강의 힘을 빌려 일본을 무력화하려는 외교를 활발히 펼쳤다. 1896년 이상재, 윤치호 등을 주축으로 정동구락부는 독립파 관료세력을 흡수, 독립협회를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자강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손탁호텔은 1905년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묵으면서 일본이 조선의 대신들을 불러 회유하고 협박하는 장소로 전락했다. 일본이 을사늑약 체결을 추진하는 아지트로 활용한 것이다. 결국 손탁은 1909년 9월 일본의 압박에 따라 손탁호텔을 프랑스인 보헤르에게 매각하고 한국을 떠난다.

 

프랑스와 미국에서 시대적 각성과 혁명, 독립을 고무한 커피와 카페의 위력은 한반도에선 통하지 못했다.
을사늑약에 이어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국권을 상실한 조선엔 암흑의 시대가 드리워진다. 커피에 대한 기록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엔 커피에 관한 기록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고종 35년(1898) 9월 12일 "(독차 사건으로) 황제와 태자의 건강이 나빠진 원인을 경무청에서 규명하게 하다"라는 대목이고, 다른 하나는 순종 8년(1915) 3월 4일 "백작 이완용에게 가배 기구를 하사하다"라는 내용이다.

 

이후 1919년 3·1운동 때까지 일제가 잔혹한 무단통치를 벌이면서, 커피와 관련한 기록을 더는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3·1운동에 놀란 일본이 문화통치로 전략을 바꾸면서,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도 유학을 다녀온 조선의'모던 보이'를 중심으로 커피하우스 개업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주권 회복을 위한 시대적 각성과 독립을 위한 저항심을 기르는 커피와 카페의 역할이 작동한 사례는 이 시기에선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다방으로 불린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은밀하게나마 펼쳐진 조선 지식인들의 저항운동은 진정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일제에 의해 숨겨져 드러나지 않을 뿐인가?


출처: 『커피인문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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