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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인문학=한국인들은 커피를 사랑한다.

커피와 다방

아마츄어작업실 아산점 대표 김남순 | 기사입력 2021/05/12 [20:05]

커피인문학=한국인들은 커피를 사랑한다.

커피와 다방

아마츄어작업실 아산점 대표 김남순 | 입력 : 2021/05/12 [20:05]

▲ 아마츄어작업실 아산점 대표 김남순, 교육전문강사아마츄어작업실 아산점, 충남 아산시 삼동로 45   © 아산미래신문

한국인들은 커피를 사랑한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인당 커피 소비량은 2018년 기준 연간 353잔으로 세계 평균 소비량의 약 2.7배이다. 국내 커피 매출액을 계산해 보면 세계 3위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등장한 시점은 언제일까? 그 시작은 선교사를 필두로 한 서양인들에 의해서 근대개항기 시절 처음 도입되었다. 한국의 커피도입에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당대 영국외교관 윌리엄 칼스가 지은 <조선풍물지(Life in Corea)> (1888)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에 살고 있는 한 독일인 집의 청결함과 안락함에 대한 감사는 최고조에 달했다. 우리들의 안락함이라는 놈은 이내 훌륭한 목욕과 따뜻한 커피(hot coffee)라는 사치함에 이르게되고, 이것들도 당연히 고마운 일이었다” - <조선풍물지>


대중화된 커피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이 당시 한국에 커피가 보급된 후 시점임을 알 수 있다. ‘언더우드 부인’으로 알려진 릴리아스 호톤 언더우드 (Lil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가 남긴 증언도 비교적 초기 기록에 속한다. 그녀는 그녀의 책 <상투잡이와 더불어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1904)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위원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현감과 그 친구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중략)… 크래커에 마머레이드를 얹은 후식은 최고의 심미안에게도 단연 만족을 줄 수 있을 만한 것이었으며, 또한 색다른 커피를 소개했다. 우리는 설탕이 떨어졌다고 속삭이지 않고 커피에 벌꿀로 향기를 돋구었던 것이다.”

 

 ▲life in corea © 아산미래신문

 저명한 지리학자인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urs> (1897)에서도 커피가 언급된다.


“노란색 비단이 드리워진 수수한 방으로 안내되어 우리는 곧 커피와 케이크를 정중하게 대접 받았어요. 저녁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으로 차려졌는데 수프를 포함해서 생선, 퀘일, 들오리요리와 꿩요리, 속을 채워 만든 쇠고기요리, 과일, 적포도주와 커피 등이 있었어요.”


이를 통해 우리는 19세기 후반 궁궐에서 커피가 서양식 요리와 함께 간단한 접대용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선교사들에 의해 도입된 커피는 대중들에게 보급되기 이전에, 먼저 궁중사람들에게 받아들여 졌음을 알 수 있다.

 

 ▲ 정관헌 © 아산미래신문

 

당시 정관헌(靜觀軒)은 궁중에서 왕실다과문화를 대표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외국문화의 유입 장소로서의 역할을 했다. 외국의 외교관들과 연회를 열고 커피를 마시며 서양의 음악을 듣던 장소로서, 정관헌은 고종이 바다 건너의 세상 이야기를 전해 듣고 서양의 문화를 접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고종과 순종의 음독을 노린 ‘독차음모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궁중에서 서양식 요리와 커피가 일상화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황성신문  © 아산미래신문

 

<황성신문> 1900년 11월 26일자에 수록된 '송교 청향관'의 광고문안이다. 여기에는 "가피차 파는 집"이라는 표기가 뚜렷이 남아 있다.


이후 고위급 관료들과 외국인들만 즐길 수 있던 고급 음료였던 커피는 손탁호텔 1층에 생긴 우리나라 최초의 카페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를 통해 점차 그 존재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다. 외국에서부터의 커피 유입이 많아짐에 따라 대중을 대상으로 한 커피 판매점도 생겼다.


1910년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일본인들에 의해 다방이 등장하였지만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을 상대로 하였기 때문에 아직 국민들에게 까지 커피의 보편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볼 수있다. 1920년대, 소수 한국인 문화인들이 다방을 운영하고 다방이 문화 공간으로 자리잡으며 일반 대중들이 커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시인 이상은 무려 네 번이나 다방을 차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 기사   © 아산미래신문


1930년대에 이르러 다방의 포화현상이 나타나 골목마다 다방 간판을 구경할 수 있었다.한국전쟁 이후 대중적인 커피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1955년 5월 16일 동아일보 기사에 “서울의 다방수가 오백이 넘는데 각 다방에서 끓이는 차는 모두가 시장에서 사오는 것으로 이중에 하나도 정식 수입된 것이 없는 만큼 모두가 미군수품이며 이 수요량은 실로 막대한 양에 달하고 있다. ‘커피’ 값은 작십오일시가로 큰통이 칠천오백환 작은통이 일천오백환인데 매일매일 시내 각 다방에서 사가는 ‘커피’류의 차원료는하루에 약 칠십오만환어치의 차를 팔게 되니 이를 전국적으로 따지고 일년분을 따지면 어마어마한 수량과 금액이 나온다” 는 대목이 나온다.

 

▲ 다방 양복손님  © 아산미래신문

 

커피가 대중화되면서 많은 이들이 다방을 찾았고 이러한 것은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1971년 경향신문은 예전의 훈훈하고 아늑한 다방의 실례로 모나리자를 들었다. "다방 정면에는 '모나리자의 미소'가 걸려있었고 마담은 항상 웃음 띤 얼굴로 분위기를 훈훈히 해주었고 조용한 음악이 6.25의 상처를 달랬다.“는 기사를 싣고있다.

 

▲ 고종과 순종  © 아산미래신문

  

▲ 담배커피사건 신문삽화  © 아산미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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