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숙종의 환국정치(換局政治)를 목숨 걸고 비판한 상소문 -정시한(丁時翰)

안종은의 '선비에게 길을 묻다'

안종은 | 기사입력 2021/08/17 [12:56]

숙종의 환국정치(換局政治)를 목숨 걸고 비판한 상소문 -정시한(丁時翰)

안종은의 '선비에게 길을 묻다'

안종은 | 입력 : 2021/08/17 [12:56]

▲ 송악면 거주. 온아신문 논설위원(전)(사)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온양향교 명륜회장. (사)한국한시협회 아산시지부 총무. 아산시 어린이도서관 근무.  © 아산미래신문

“폐비(廢妃)는 전하를 모신 지 거의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배필로 대우하셨고 백성들은 어머니로 섬긴 바 있습니다. 비록 폐하더라도 별궁에서 살게 하고, 예로 대우하여 전날의 은의(恩義)를 온전하게 하심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폐서인라 부르며 여염집에 거처하게 하시니 전하의 대우가 너무 야박하지 않습니까? 군자는 비록 절교하더라도 상대에 대해 나쁜 말은 하지 않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불쌍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기는커녕 도리어 박절하고 인정없는 처사를 내리시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입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35권 「숙종조고사본말(肅宗朝故事本末)」 <정시한 소(疏)>

숙종은 재위 기간 세 번의 환국을 단행하였다. 환국이란 급작스럽게 정권이 교체되는 것을 말하며 당시에는 서인과 남인이 속된 말로 상대 당을 죽여야 자당이 산다는 막가파 식의 치열한 붕당정치를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은 왕권 강화를 도모함과 개인적 사사로운 뜻을 관철시킬 목적으로 집권세력을 일거에 축출하고 그 반대 당파에 실권을 부여하는 것이지만 이는 수 많은 인명의 살상과 귀양으로 귀결되어 결국은 붕당정치만 더욱 심화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임금의 뜻 하는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별다른 사유나 사소한 처사를 문제 삼아 집권당의 영수와 권신들을 하루아침에 내쳐 귀양살이나 북망산천으로 보내버리는 모진 임금의 재위 기간에는 차라리 애초부터 출사하지 않거나, 미관말직이라도 당장에 던져버리고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거나 독서와 저술 활동으로 일관하다 고종명(考終命) 하는 것이 벼슬아치 이전에 도의나 인륜을 금과옥조 목숨처럼 받들어 살아온 참 선비의 기상에도 부합하겠다.

 

정시한(1625년<인조 3년>~1707년<숙종 33년>. 본관은 나주이며 호는 우담(愚潭)으로 강원도 원주 법천(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향리에 은거하며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던 중 조야의 대신들에게 그의 행실이 전해져 유일로 천거되어 모두 10여 차례나 벼슬이 제수되었지만, 오히려 자신에 대한 소문이 실제보다 지나치게 부풀려졌다고 부끄럽다 여겨 단 한번도 실직에 나아간 적이 없었다.

 

진보현감을 제수받고 이를 모친에게 여쭙자 ‘나는 네가 봉록으로 나를 봉양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하거라, 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그의 문집 우담집에 전한다. 평생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사칠변증설(四七辨證說)을 저술하여 율곡의 학설을 비판하였으며 갈암 이현일과 더불어 왕래하며 서신으로 서로의 학문적 성과를 공유하고 퇴계학파의 성립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상소문은 문체로 분류시 소(疏)라 칭하며 글의 내용이 명약관화하고 진실하며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만큼 정성스럽게 사리를 분별하여 지어야 한다. 조선시대 수 만 편의 상소문 가운데 중봉 조헌과 면암 최익현의 도끼를 지참하고 궐문에 엎드려 올린 부월상소(斧鉞上疏), 명종 임금을 천하의 고아로 문정왕후를 과부로 일컬으며 비판한 남명 조식의 상소문은 널리 인구에 회자 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인터넷 논객이 ‘진인 조은산, 이라는 필명으로 상소문 형식을 빌어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올려 국민적 큰 반향을 얻은 바도 있다.


“이 나라는 본시 너그럽고 어진 마음으로 세워져 예로써 신하를 대우하고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니, 어찌 거듭하여 대신들을 죽인 전하의 조정 같을 때가 있었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16년 동안 정국은 크게 세 번 변했습니다. 그때마다 오로지 한쪽 편만의 사람들만 쓰시어 내쫓긴 자들이 한을 품어 뼈에 사무쳤고, 뜻을 얻은 자들은 마음대로 보복을 자행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예의와 사양이 있어야 할 조정은 싸움터가 되었고 교화의 모범이 되어야 할 벼슬아치들은 중상모략을 일삼습니다. 전하께서도 그저 이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피차를 융화하여 인심을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으시니, 신은 이대로 가다가는 전하의 조정에 싸움이 그칠 때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오래전부터 사극 드라마의 주요 단골 소재였던 후궁 희빈 장씨의 소생(후일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계기로 이를 반대한 서인이 축출되고, 장희빈을 지지했던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을 때나, 이전 남인 영수 허적의 궁중 유악(기름칠 한 천막)을 허락없이 사용한 사건과 그의 서자 허견과 관련된 역모건으로 남인이 축출되었을 때에도 임금의 모진 처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정시한의 상소는 숙종에게 눈엣가시처럼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 박태보와 오두인을 혹독한 고문을 가하여 죽인 일을 거론하며, 간언을 올린 자를 때려죽인 임금은 과연 어떠한 임금이냐고 직격탄을 날린 정시한을 향한 숙종의 처사가 실록에 전하는 바 “숙종실록 19년 8월 6일, 기록에 지난해에 올린 정시한의 상소가 이미 사론(邪論)의 효시(嚆矢)가 된 것이다.

 

근래 박정이 올린 상소 말미에 정시한을 온갖 말로 칭송하더니 흉인(凶人)에게 이런 큰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진선(시강원의 4품 벼슬) 정시한을 사판(仕版)에서 영원히 삭제하라,” 라고 명했다.


사판이란 벼슬아치 명부로 단 한 번도 실직에 부임하지 않은 정시한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지만 이마저도 조야의 많은 신료들의 주청으로 숙종은 이를 결국 철회하였다.

 

사마천의 사기 상군열전(商君列傳)에 천인지낙낙(千人之諾諾) 일사지악악이란 말이 있다. 천인지낙낙은 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덮어 놓고 ‘예 예,’ 하고 아첨하는 것이고, 일사지악악이란 그 반대로 한 사람의 바른말 하는 곧은 참 선비를 말함이다.


유신헌법을 만들어 1인 장기집권을 꾀한 박정희 정권 때나, 근래 조국의 법무부장관 임명 때 문재인 정권하에서 이를 부당하다 여겨 간언한 고위관료가 몇이나 있었는지 필자는 들어 알지 못한다. 정부 부처의 각료들이 대통령에게 직언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라면 그 직위에 연연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감투라면 오뉴월 오이꼭지라도 뒤집어 씀을 오매불망하다 청문회에서 불법, 비리, 부정의 화신처럼 일그러져 개망신을 당하는 꼴을 보는 국민도 이젠 지겹다.  그 서슬퍼런 정국에서 목숨을 걸고 진언한 올곧고 결 바른 선비 정시한, 그가 사뭇 그리운 오늘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선비에게 길을 묻다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