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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특집] 충남 아산지역 기독교 전래사Ⅱ

아산미래신문 | 기사입력 2021/07/28 [20:05]

[종교특집] 충남 아산지역 기독교 전래사Ⅱ

아산미래신문 | 입력 : 2021/07/28 [20:05]

 

▲ 왼쪽부터) 둔포감리교회, 온양교회(감리교회), 둔포신항감리교회, 온천 중앙교회 전경   © 아산미래신문



기독교가 충남 아산시에 전래된 문헌상의 가장 오래된 교파와 교회는 감리교단인 백암리 교회(옛, 구미교회)이다. 1901년 백암교회가 세워지고 둔포감리교회, 온양교회, 신항감리교회가 세워졌다. 두 번째는 장로교회이다.

 

Ⅰ아산시 기독교 전래사
1. 아산의 역사

Ⅱ 충남 아산지역 기독교 전래사
1. 충남 아산시는 어떻게 감리교가 먼저 들어 왔는가?

2 .'아산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감리교회는 둔포감리교회'
3. 세 번째로 세워진 교회는 온양교회(감리교회)
4. 네 번째로 세워진 교회가 신항감리교회
5. 다섯 번째로 세워진 교회가 온천 중앙교회

Ⅲ아산 땅에 장로교회는 어떻게 전래 되었는가?
Ⅳ 아산시의 교회 현황

자료=충청교회사연구소 황기식 박사(탕정 동산교회 담임목사)


2. 아산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감리교회는 둔포감리교회이다.

1902년 4월5일에 설립된 교회이다. 이 연일 성도 가족이 중심이되어 둔포면 둔포리(전 농협창고)에 초가집 15평을 개조하여 기도처로 삼고 예배를 드림으로 둔포감리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둔포감리교회는 성명 미상의 여 전도사가 부임하여 복음사역을 하였고, 복음전도의 일환으로 진명학원을 설립운영하며 한글을 모르는 문맹자를 교육하는 육영사업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진명학원은 한글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의해서 강제로 폐쇄되고 말았다. 둔포감리교회는 교회 건축을 조음씩 넓혀나가면서 대형교회로 성장하여갔다.

 

1902년에는 초가집 15평으로 기도처로 삼은 후 1939년에는 목조 37평(둔포면 둔포리 257-1번지)로 재건축하였다. 1973년 스라브 주택33.7평을 건축하였고, 1977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휴직리) 석곡감리교회를 개척하여 쌀100가마니를 지원해 주었다.

 

1978년에는 150평을, 1983년에는 주방 50평을, 1984년에는 식당 30평과 교회별관 5평을, 1985년에는 교회 입구 포장 공사와 1988년에는 34평의 성전 증축과 1990년 교회 묘지 조성과 상조회를 조직하였고 1991년에는 교육관 주택, 관리인 사택, 식당, 화장실 72평을 증축한데이어 1994년에는 교육관52평과 주택50평 증축과 운동장 포장을 하였다.

 

1995년에는 대지 416평을 구입하여 주차공간을 확보하고 1998년에는 대지 85평과 부교역자 사택을 구입, 총 대지 1,336평에 이르고 있다. 

 

둔포 감리교회는 꾸준한 성전건축과 인적 성장으로 크게 부흥하였다. 특히 둔포면 테크노 빌리지 신도시가 형성된 이곳에서 3,000평의 땅과 건평 900평으로 5층 건물을 건축하여 2018년 9월에 입당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둔포 감리교회는 꾸준한 성장을 이루어가고 있으며 지역사회에 어머니교회로서 지역 주민들을 돌보며 섬기고 있다.

 
3. 아산시에 세 번째로 세워진 교회는 온양교회(감리교회)이다.  
온양 감리교회는 온양에서 최초로 세워진 백암교회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이다. 백암교회 최봉현 전도사의 전도팀들이 온양 시내로 나가서 열심히 전도하여 교인들이 모여서 공동체가 형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최봉현 전도사는 아산군 온양면 읍내리 23번지에 온양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가 1904년 3월20일이었다. 계속 부흥한 온양교회는 기쁜소식도 있었지만 어려운일도 있었다. 온양교회가 담임목사와 전도부인이 없어서 크게 곤란을 겪던 중 여름에 경성여자 성경신학교에 다니는 한정선씨가 하기휴가를 이용하여 1904년 7~8월 두 달동안 온양교회에 와서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밖에도 구미동교회(백암교회, 온천교회, 마곡교회)등에서 박해하는 마을들을 순회하며 주일학교를 부흥발전 시키었다. ....앞으로 희망이 많다는데 순행목사는 예산구역 최성모씨 더라(기독신보 10권중 1929. 8.21자 재인용) 아산지역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온양감리교회는 초기부터 백암교회의 도움과 최봉현 전도사에 전도열정 그리고 경성여자 신학생의 도움으로 교회가 부흥하였다.

 

온양은 1915년 충남의 감리교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 1915년 1월 구미동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공주선교부 선교사 스웨어리(Wilburc, C. Swarer, 한국명:서원보)와 신흥석 오익표, 김인권 등 한국인 목사들에게 매우 강력한 종교적 체험이 일어났고 곧 바로 참석자들에게도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밤낮으로 열렬한 기도에 동참하면서 소리치며 탄식하며 죄로 말미암아 울부짖었다. 또한 공주로 가서 10일동안 부흥회에 참석하여 구미동교회와 유사한  영적 체험이 일어났다. 그 후 2달간 충남지역의 7개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500명이상의 사람들이 예수 부활의 기독교의 신앙을 체험하고 기독교로 전향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성령의 역사가 온양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온양을 포함한 아산지역의 감리교회들은 1925년 순회 전도대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전도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그결과 2월과 3월에는 온양 온천20명, 아산 새말85명, 아산 둔포95명, 모두 200명의 새로운 신자를 얻을 수 있었다. 

 

아산지역에 세 번째로 감리교회가 세워진 온양교회가 초기부터 백암교회의 도움과 경성여자 신학생들의 도움으로 교회가 점점 풍성하게 성장해 나갔다.
 
4. 네 번째로 세워진 교회가 신항감리교회이다.
신앙 감리교회는 개화파 윤치호 박사 별장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윤치호 박사는 조선 최초의 남감리교회 세례1호이다. 미남감리교는 상해 산동선교부를 세우고 중화서원을 설립했다.

 

갑신정변으로 이곳에 피신해 온 윤치호는 본넬 선교사에 의해서 영화학교에 입학하여 2년6개월간 신학 공부를 하며 졸업 마지막 학기에 회심하여 세례(1887. 4.3)를 받고 미국 밴드빌트 신학대학원 신학석사와 애모리대학 박사 학위를 받고 1895년 개화파를 사면함으로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조선으로 귀국한 윤치호는 고종황제로부터 의정부 참의 임명(1895. 2.13)하시고 4월에는 내각 비서관, 7월16일에는 외무협판(외교부 차관), 러시아 황제 대관식 칙사 수행원(1896. 3.19)로 그리고 남감리교 창설을(1896. 9.10)하였고, 만민공동회의 독립협회 서재필 박사와 함께 독립신문을 독립협회 기관지로 만드는데 책임자로 일 하였다.

 

윤치호는 덕원(원산)감리 삼화감리(1899년), 1903년 천안 직산 군수, 1904년 외무협판 재 취임, 1904-1943년 YMCA이사 총무와 회장을 하였고, 1907년 송도학원 설립, 애국가 작사, 1908년 대성학교 교장 취임, 1911년 105사건 주모자로 4년간 복역을 하였다.

 

윤치호는 천안 군수(1903. 7.6)에 임명되었다가 1904년 3.11 외무협판에 재취임 하였다. 윤치호는 천안 군수직을 사임하고 자신의 고향에 돌아와서 세워진(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자신의 별장을 헐고 교회를 세웠다. 이것이 신항감리교회이다.

 

아마 1904년 3월11일 외무협판에 임명되기 전 윤치호는 무안 감리(군수)로(1903. 12.14) 임명 받아 부임중 1904년 3월11일에 외무협판에 두 번째 임명이 된다. 그러므로 윤치호는 무안군수(1903. 12.14)로 임명을 받았지만, 고종으로부터 외무협판(1904. 3.11)에 재 임명 될 것이라고 하여 임명받은 부안군수로 내려가지 않고 자신의 고향 신항리로 오셔서 2개월반(1903. 12.14-1904. 3.10)을 쉬게 된다.

 

윤치호는 1903년 12월24일 천안 군수를 사임하고 외무협판에 임명될 때까지 고향에서 쉬면서 자신의 별장에서 성탄절에 예배를 드린다. 그러므로 신항 감리교회는 1903. 12.25 성탄절에 윤치호가 예배를  드린 자신의 별장을 교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외무협판에 임명되기 전에 교회를 개조하여 예배를드린 후 외무협판에 취임 하려고 하였다라고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신항 감리교회는 교회 행정의 지연과 교회 건축을 윤치호가 남감리교 창설을 집중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인 1920-1943년에 신항 감리교회를 1920년에 교회를 건축하여 신항감리교회로 연회에 등록하였다. 그리고 신항감리교회는 교회 이름을 윤치호 박사 기념예배당으로 성전 입구에 간판을 메달고 오늘에까지 신항감리교회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5. 아산 온양에 다섯 번째로 세워진 교회가 온천 중앙교회이다.
1932년 11월25일 유정열 권사와 이헌영 전도사가 아산군 온양읍 온천리에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온천 중앙교회는 1933년(옛 온양 등기소 앞에)예배 처소를 마련하고 성전을 건축하여 교회를 유지해 오다가 1950년 6.25 전쟁시 전소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53년 이태선 담임목사가 시무 중 온양온천역에서 2분 거리인(옛 온양 경찰서 뒤편)에 교회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60년 동안이나 지나오며 건물이 협소하고 새로운 산업중심의 도시가 형성됨에 따라 성전 건축을 결심하게 되었고, 21대 담임목사인 김희인 목사의 지도아래 1991년 10월15일 성전기공 예배를 드리고 4년 후 1995년 6.1 입당예배를 드렸다. 연건평 1,701평, 지하2층, 지상8층으로 30여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 타워가 있으며 35억원의 건축비가 들었다.

 

4층은 180석의 식당 5층은 소예배실, 각기관실, 개인기도실, 목사관이 있다. 6.7층은 900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대예배실이다. 8층은 음향조정실이고 노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터도 설치하였다. 그리고 2001년 11월26일 봉헌 예배를 드렸다.

 

온천중앙교회는 아산시 용화동에 땅을 구입한 후 2013년 4월 800평 규모의 아름다운 새 예배당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여 12월 9일에 입당 예배를 드렸다. 온천중앙교회는 세 번이나 이름이 변경되었다. 첫 번째는 온양 온천교회라고 하였고, 후 두 번째는 온양 온천중앙교회, 세번째는 온천중앙교회라고 부르고 있다.

 

2. 아산 땅에 장로교회는 어떻게 전래 되었는가?

아산 땅에 장로교가 세워진 시기는 1945년 해방 후 1946년 4월15일 온양제일교회가 최초로 세워졌다. 이제하 집사(이정근 목사, 이춘근 장로 부친)가 중심이 되어 온양 온천리 47번지 이재하 집사 댁에서 김성옥, 문의수, 장총각, 김태진, 임윤환, 김인도, 이귀화, 송정의, 오순남 10명이 모여서 첫 예배를 드리며 창립되었다.

 

이분들은 해방 이전부터 감리교회를 다녔던 교인들이었지만 장로교신앙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아산 온양에는 감리교 선교지이었기 때문에 장로교회는 없었고 감리교회만 있었기 때문에 감리교회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제하 집사를 중심으로 장로교회를 온양에 세워야 한다는 뜻과 교감이 형성되어 해방 직후 월남한 북한지역 기독교인들과 해외에서 귀국한 기독교인과 자신들이 다니는 온양 감리교회 다니는 장로교신앙으로 형성된 교인 10여명이 나와서 온양장로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 수용소 교회와 온양교회가 합병하여 온양온천 제일교회라고 하였다. 1965년 2월 7일 다시 온양제일교회라고 이름하였다.

 

이제하 집사는 누구인가?
이제하는 온양 장로교회 설립자이다. 이제하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배재학당에서 공부하기도 했으나- 부친이 충북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로 이주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가족을 따라 내려갔다. 보은에서 이제하는 봉황 장로교회 출석하였다.

 

보은은 북장로교 선교지역이므로 자연히 장로교회 다니게 되어 장로교의 신앙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안광국을 친구로 만나게 되었다. 안광국은 후일 숭실중학교를 졸업(1933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1936년), 평양 장로회신학대학(1939년)졸업, 용천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1939. 10월), 만주신학교 창설 겸 서무과장(1941-1945년)을 하였고, 제35회 37회 총회 회의록서기(1952년), 이리신광교회 담임목사(1951-1953년), 38-42회 총회서기(1953-1957년), 총회 교육부 총무, CBS방송국 국장(1954-1968년), 북아현교회 담임목사(1969-1975년), 기독공보사장(1976-1978년), 대전연합 봉사회 상무이사(1977. 11)로 시무하다가 하늘 나라로 가신 한국교회를 이끌어 오신 목사님이셨다.

 

서로 친구가된 이제하와 안광국은 친구에서 사돈관계로 발전한다. 이제하의 여동생과 안광국 남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사돈관계로 이제는 진실한한 사이가 되었다.

 

이제하는 19살 때 봉황리에 살던 처녀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하지만 2년만에 부인과 사별하게 된다. 사별한지 1년 후에 조치원 처녀와 결혼하여 1남1여를 두고 살았으나 그만 아내가 산후병을 앓게 되자 이제하는 온양 온천에서 온천물로 아내를 치료하려고 보은에서 아산 온양으로 이주하게 된다.

 

또한 안광국은 이제하에게 온양에가서 교회를 개척하라고 권고하였고 정규태(후일 기장 교회사가)도 이제하를 찾아가서 권면하였다. 그래서 이제하는 온양에 왔으나 장로교회가 없어서 자신이 다니는 온양 중앙감리교회에 등록하여 다니다가 장로교를 세우려는 뜻있는 성도들을 모아 1946년 4월15일 온양장로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들은 사제를 모아 탕정관 뒤에 있던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예배당을 꾸며서 예배를 드리니 이것이 온양장로교회 시작이 되었다.

 

1945년 11월7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충남노회가 창립 조직되었고 충남노회 에서는 1947. 4.9 제3회 노회에서 온양 장로교회 당회장으로 송태일 목사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온양 장로교회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노회에서는 전도 목사로 조동윤 목사를 파송하였다. 기장의 분열로 조동윤 목사는 신웅천교회로 이임해 가시고 제2대 전서국 담임목사가 부임했다.

 

온양장로교회는 계속 부흥하며 13분의 담임목사가 계속 이임하고 또 떠나고 하는 담임목사 교체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여 아산 온양에서 대형교회로 성장하였다. 온양 장로교회는 1954년 2.14 온천 제일교회로 명명하여 예배를 드렸으며, 1960. 5.15 삼일교회가 분립되어 나갔고, 1965년 2.7 온천 제일교회에서 온양 제일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온양 제일교회는 1954년 10월24일 첫 번째로 풍기교회를 개척, 두 번째로 1957년 4.5, 아산군 배방읍 중리에 금곡교회를 개척하였고, 세 번째, 1964년 8.23 신리교회(탕정군 신리)를 개척하였고, 넷째로 1965년 4.11 유곡교회(아산군 송악면 유곡리)개척, 1975년 12.28, 다섯째로 동화리교회 개척(아산군 송악면 동화리)하였다.

▲ 온양제일교회  © 아산미래신문



온양 제일교회는 1991년 5.8 세 번째로 아산시 권곡동 219-9소재지에 3,000평 219-45번지를 900평 분할하여 건축하였다. 1997년 8.3. - 1998. 12.6 네 번째로 802평의 교회를 준공하여 입당예배를 드렸으며 방주모양의 교회로 세워졌다.

 

온양제일교회가 1946년 아산에 들어와서 세워지므로 장로교회가 확산되어 예장통합 33개 교회, 예장합동 27개 교회, 예장백석 13개 교회, 예장합신 4개 교회, 예장대신 6개 교회, 예장개혁 20개 교회, 예장고신 5개 교회, 총 예장이 107개 교회공동체가 형성되어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형제 교단으로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3. 아산시의 교회 현황

2018년 아산시의 교회는 장로교회에 속한 장로파 교회가 108개 교회, 감리교회가 101개 교회(아산지방26개, 온양 동지방44개, 온양 서지방31개)이다.

 

성결교회는 37개 교회(기성21개, 예성4개, 나성12개)이며 침례교회는 10개 교회이다. 순복음교회는 21개 교회(기성17개, 예하성4개)교회이다.

 

성공회는 3개, 구세군 5개 약357개 교회가 아산지역에 산재하여 천국 복음을 전하고 있다.

 

아산시는 기독교 연합회가 구성되어 매년 부활절 연합예배와 심령대부흥, 6.25구국집회, 교단별 목회자 체육대회와 성지순례를 시행하고 있다.

 

아산시는 기아대책을 구성하여 매주 수요일 불우노인 밥퍼 봉사와 캄보디아 어린이와 중고등학생, 청년들에게 매년 연합사경회를 통하여 기독교 복음을 가르치며 학교 세우기를 적극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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