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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특집] 충남 아산지역 기독교 전래사Ⅰ

아산미래신문 | 기사입력 2021/07/22 [20:25]

[종교특집] 충남 아산지역 기독교 전래사Ⅰ

아산미래신문 | 입력 : 2021/07/22 [20:25]

▲ 기독교가 충남 아산시에 전래된 문헌상의 가장 오래된 교파와 교회는 감리교단인 백암리 교회(옛, 구미교회)이다. 1901년 백암교회가 세워지고 둔포감리교회, 온양교회, 신항감리교회가 세워졌다. 두 번째는 장로교회이다.(사진은 1993년 11월 11일 70평 규모로 건축된 백암교회다. 백암교회는 화재 등의 이유로 세 번이나 건축됐다.)   © 아산미래신문



이번 종교특집은 아산의 역사를 기원전 이후의 아산, 백제시대, 통일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 아산의 모습(행정구역 등)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기독교가 충남 아산시에 전래된 문헌상의 가장 오래된 교파와 교회 등을 소개하려 한다. -편집자 주-

 

Ⅰ아산시 기독교 전래사
1. 아산의 역사

Ⅱ 충남 아산지역 기독교 전래사
1. 충남 아산시는 어떻게 감리교가 먼저 들어 왔는가?
2 .'아산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감리교회는 둔포감리교회'
3. 세 번째로 세워진 교회는 온양교회(감리교회)
4. 네 번째로 세워진 교회가 신항감리교회
5. 다섯 번째로 세워진 교회가 온천 중앙교회

Ⅲ 아산 땅에 장로교회는 어떻게 전래 되었는가?
Ⅳ 아산시의 교회 현황

자료=충청교회사연구소 황기식 박사(탕정 동산교회 담임목사)


1. 아산의 역사

1) 기원전 이후의 아산 
아산은 신석기시대부터(1,000-3,000년) 여러 자료가 발굴되었다. 신창면 남성리 서관과 세형동점 3점을 비롯하여 염치면 백암리, 인주면 관암리, 조흥리에서 청동기 유물인 마제석기 무문토기편이 발견되었고, 음봉면 월랑리에는 고인돌이 유존하고 있어 청동기시대 풍부한 유적 형성을 아산이 당시 정치세력의 거점으로서 국가의 초기 형태인 소국의 발생지임이 확실하다.

 

백제의 성립 이전 기원을 전후한 시기 아산은 마한의 세력권하에 있었다. 마한은 내부적으로 54개에 달하는 소국들의 연맹체에 불과했다. 확실하지 않지만  苒路國인 것으로 추측된다. 마한은 천원군 직산면 소재로 추정하는 目支國(목지국)을 그 맹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아산의 苒路國은 마한의 중심적 위치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성장했으리라 본다.

 

2) 백제시대 아산
백제시대 온조왕 36년(기원후 18년) 마한은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근거로 삼국사기에서 탕정성의 축성기사에서 백제에 속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백제시대에 아산은 3개군현이 설치 되어있다. 탕정군, 아술현, 굴직현이다.

 

현재 온양시(아산군과 온양시 합치기전)는 탕정면, 배방면, 송악면에는 탕정군, 영인면, 인주면, 음봉면에 걸쳐 아술현이고 신창면, 선장면 지역에는 굴직현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탕정이라는 이름이 백제시대 지명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온양의 온천은 이미 백제시대에도 유명했음이 문헌에도 더러 나타난다.

 

3) 통일 신라시대
백제 멸망후 문무왕(661-680년)초 신라는 탕정군을 탕정주라하고 중앙에서 총관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그리고 전국은 9주로 나누고 주에는 진골출신 귀족을 경주에서 파견하였다. 신문왕 5년 685년에 탕정주는 당나라군을 축출하고 폐지되었다.

 

아산은 백제멸망 후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으로 부각된 것을 제외한 후 정치적으로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4) 고려시대
후 삼국시대 아산은 태봉국과 남방세력의 국경선에 위치하고 있었다. 후삼국 초기에 아산은 태봉국에 속해 있었다. 918년 태봉국 내부의 정치적 변동과 함께 왕건이 궁예를 폐하고 고려를 건국하자 남부의 웅천주(공주), 운조(홍성) 일대가 반발하자 후백제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때 아산은 고려와 후백제의 접경지역에 있게되어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왕건은 김행수를 동남도 초토사 지아주사로 삼아 아산지역을 진압하고 고려의 땅으로 복속시킨 후 백제 진출 발판으로 삼았다.

 

신라시대 “음봉”이라 불리던 아산은 “인주”라는 이름으로 되었다가 백제 때 牙述(아술)을 계승한 牙州(아주)로 고려 후기 때에 바뀌게 되었다.

 

탕정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던 온양지역은 고려 초에 온수군 이라 하였다. 백제 아술현 지역이 인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백제시대 지명 개편 작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백제의 굴직현, 신라시대는 신창현이라 부르던 신창지역은 고려초에 신창현이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 아산은 牙州(아주)의 使潽浦(사보포)에 조창을 설치하고 하양창이라 하였다. 하양은 13조창의 하나로 조세업무를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에 탕정구역은 소멸된다.

 
5) 조선시대의 아산
조선시대의 아산은 아산, 온양, 신창 3개군현이 통합하였다. 고려군의 아주(牙州)가 아산현으로 개편된 것은 태종13년(1413년)이었다.

 

그 후 아산현은 행정 구역이 일시나마 폐지 되었다가 태종14년(1414년) 온수군과 신창현을 溫昌(온창)이라 이름 하기도 하였으나 16년 후 다시 원래대로 아산현이라 불렸다.

 

온양의 이름은 세종14년(1432년)에 이름을 부르게 되었고 군수(정4품)를 수령으로 파견하였다.

 

조선시대 아산현 온양군, 신창현 규모는 토지와 인구에 있어서 아산, 온양, 신창 순이었다. 1789년 아산은 18,354명에 비하여 온양은 15,503명, 신창은 1,122명이었다.

 

군현의 규모는 아산11면 온양9면, 신창8면으로 아산 지역의 3개 군현 중 아산 현이 가장 大邑(대읍)으로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아산의 인물로는 배방면 중리, 청백리, 맹사성, 임진왜란의 영웅 염치면 백암리의 이순신, 아산 출신 발명왕 관노출신 장영실이있다.

 

6) 근대의 아산
아산은 1894년 청.일 전쟁의 발원지로 아산의 백석포였다. 아산면안에 정박중에 있는 청나라 군대를 공격함으로 청.일 전쟁이 발발되었던 것이다. 1895년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종래에 도(道) 대신 23府(부)로 나누고, 종래의 목, 군, 현 등의 구분을 폐지했다.

 

아산 지역은 아산, 온양, 신창 3개 군을 홍주부(洪州府)의 관할에 두었다. 이듬해(1896년) 지방제도가 재개 되면서 13도 제가 시행되었고, 이에 따라 아산, 온양, 신창군이 충청남도에 소속된다. 1914년 3.1府(부) 총독부는 지방제도를 개편 12개부, 317郡(군)으로 되어 있던 것을 통폐합 220군으로 편성했다.

 

아산은 아산, 온양, 신창 3개군으로 되어 있던 것이 아산군으로 통폐합되었다. 그리고 아산군은 온양, 송악, 배방, 탕정, 음봉, 염치, 둔포, 영인, 숙정, 도고, 학성면 등 12개 면 162개 理(리)로 구성되었다.

 

오늘날 아산군의 행정 개편은 1914년 개편의 근간을 이루고 있지만 그 후 부분적으로 변동이 있었다. 1917년 숙정면을 선장면으로 학성면을 신창면으로 개명하였으며 1944년 온양면이 온양 읍으로 승격 온양의 군치(郡治) 중심이 되었다. 1986년 온양 읍이 시로 승격되어 아산군으로부터 분리해 나갔다.

 

아산의 근대 인물은 개화파 윤치호가 있고 김옥균의 묘소가, 전 윤보선 대통령의 생가와 묘소가 둔포면과 음봉면에 남아있다. 백제시대부터 온양 온천이 있었고, 일제 때는 장항선이 개통 되므로 온양 온천과 도고온천, 최초에는 아산온천이 개발되어 휴양도시가 되었다.

 

1960년 염치면 백암리에 이순신 장군의 사적지 현충사와 아산만 등의 연안지역 개발이 되므로 관광휴양도시로 인주면 지역은 기간사업시설이 조성되어있다. 특히 외암마을을  관광지로 손꼽은수 있다.


Ⅱ 충남 아산지역 기독교 전래사 
기독교가 충남 아산시에 전래된 문헌상의 가장 오래된 교파와 교회는 감리교단인 백암리 교회(옛, 구미교회)이다. 1901년 백암교회가 세워지고 둔포감리교회, 온양교회, 신항감리교회가 세워졌다.

 

두 번째는 장로교회이다. 장로교는 전라북도지방(전주-군산)들어가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돌아서 기독교가 들어왔다. 1969년 군산선교부를 개설하여 서천, 장항, 부여, 보령으로 들어와 장로교가 정착 되었다.

 

1896년 장.감 예약 협정으로 충남은 감리교(서천.장항.부여.보령은 남장로교회 지역) 지역으로 협정하였다. 장로교는 장항, 부여, 보령, 서천 4개 지역 만이 장로교로 확장되었고 그 외 충남지역은 감리교 서교책임지역이 되었다.

 

아산 지역에 들어온 장로교회는 1946. 4. 15. 온양 제일교회가 세워지므로 장로교회가 확산되었다. 그 외 성공회, 침례교, 성결교, 나사렛, 순복음 등의 교단이 아산에 들어와서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신앙고백하는 357개 교회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1. 충남 아산시는 어떻게 감리교가 먼저 들어 왔는가?

아산의 감리교 전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327-1번지에 백암교회가 최초로 세워졌다. 백암교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온양권 이북면의 뱀밭 또는 구미동 일부를 병합하여 백암리고 불렀다.

 

백암리는 九美洞(구미동) 구미골 구묵골 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마을에 아홉가지 모양의 아름다운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현충사를 휘어감는 산세와 둘째로, 현충사 앞으로 흐르는 곡교천, 셋째, 방화산의 절경 넷째는 방화산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 등등이다.

 

이 절경이 있는 방화산 기슭에 바로 1901년 백암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아산은 백암 감리교회로 시작되어 기독교가 확산되었다.

 

아산의 백암교회는 1901년 최봉현 전도사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1901년 5월24일 최봉현은 인천 내리교회 권사였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아산 구미골에 내려와서 전도 하므로서 아산 땅에 기독교 복음이 뿌려지기 시작하였다.

 

인천 내리교회는 최봉현 권사를 평신도 전도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1901년 5월24일 아산지방에 전도를 하기 위해 내려 보냈다.


감리교회는 1902년 공주 선교부를 설치하고 다수의 선교사들이 상주했다. 스크랜톤(W. B. Scranton, 1898년 주재), 맥길(W. B. Mcgill, 1903-1905년 주재), 샤프(R. A. Sharp, 1903-1906년 주재), 윌리엄스(F. E. C. Willams, 우리암 1906-1940년 주재), 스웨어러(W. C. Sweaer, 서원보), 테일러(C. Taylor, 대리오) 케이블(E. M. Cable, 기이부), 밴버스 커크(J. D. Van Buskirk, 반복기), 아멘트(C. C. Ament, 안명도), 파운더(N. Found, 방은두), 보딩(H. P. Bording, 보아진), 사우어(C. C. A. Sauer, 사월), 올더파더(J. Oldfather, 오파도)선교사들이 주재하고 있었다.

 

선교부내에는 병원과 교회 영명학교를 세워 전도와 교육으로 열심히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12월에 온양을 방문했던 공주선교부 주재 테일러(Corwin Taylor, 한국명:대리오)선교사는 구미동교회(현 백암교회, 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는 최봉현 전도사가 1909년 9월 인천 제물포에서 구미동교회로 이주한 후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테일러 선교사는 구미동을 방문하니 그곳에 무려 70명의 교인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말하며, 마을 전체가 예수를 믿고 있다며 놀라워했다. 최봉현은 소작인을 관리하는 “마름”의 지위를 이용하여 주민을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해인 1911년에 다시 구미동교회를 방문하니 교인수가 100명으로 늘었을 뿐아니라 거기서 2마일 떨어진(온양)에도 70명이 예배하는 공동체가 새로 생겨났음을 말하고 있다. 그 곳이 바로 온양감리교회(현 아산시 온양1동)이다라고 테일러 선교사 선교보고에 그렇게 말하고 있다.


최봉현 전도사는 백암교회 전도사로서 백암교회를 돌보면서도 자신과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 정재관 전도사를 온양교회(현 온양감리교회)로 파송하여 사역케 하였다. 온양교회 역사에서도 테일러 선교사는 1911년에 온양 지역을 방문한 결과 벌써 70명의 성도들이 교회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라고 말함으로서 온양교회는 최봉현, 정재관 등등의 권사들이 전도의 결과로 형성된 교회공동체였다.

 

최봉현 전도사에 의해서 백암교회는 계속 부흥발전하여 교인들이 많아지므로 1915년 초가 12칸짜리의 집을 구입하여 첫 번째로 성전을 건축하였다. 아름다운교회, 지역을 위한 진리의 전당이었다. 1970년 박정희 정권이 현충사 성역화로 현충사에서 교회가 보인다는 이유로 철거를 하였다. 보상을 미비하게 받고, 1970년 10월 42평의 규모로 다시 교회당을 건축했다.

 

세 번째 건축은 1992년 4월24일 오후3시경 교회가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전직 시청 직원이었던 정신이상자가 교회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난동을 부리며 교회에 불을 질러 교회건물이 모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래서 다시 건축을 시작하여 1993년 11월11일 70평 규모로 건축하였다.

 

백암교회는 세 번이나 건축하였다. 그리고 봉헌예배를 드려 오늘까지 백암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진리의 방주로서 지역민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교회로 현충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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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황기식, 윤치호 애국가 작사 확정세미나, 윤치호박사 연혁:2015.8.10.
22. 2018년도 기독교대한 감리교회 주소록, 서울: 밀알기획,2018.
23. 아산지역 교회 교단별 수첩, 2017.


다음호에는 Ⅱ. 충남 아산지역 기독교 전래사 두번째 이야기 '아산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감리교회는 둔포감리교회', 세 번째 온양교회(감리교회), 네 번째 신항감리교회, 다섯 번째로 세워진 온천 중앙교회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Ⅲ. 아산 땅에 장로교회는 어떻게 전래 되었는가?, Ⅳ.아산시의 교회 현황이 기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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