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은 조선에 대한 일제 침략의 중대 변곡점이 된 일대 사건이었다. 전 세계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각축을 벌이던 시기 중 조선에 대한 상국으로서의 지배권을 놓지 않으려는 청나라에 대해, 십 수년을 철저하게 준비해 온 일본은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그에 따른 청나라의 개입을 한반도 침탈의 더없는 구실로 삼았다. 서해 지역에서 군산을 제하면 곡류를 비롯한 물류 소통의 최대 거점이었던 아산은 1894년 6월 9일 백석포에 청군 선발대가 상륙함에 따라, 청나라 군대의 주둔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일본군의 공격에 따라 풍도 앞바다의 전투, 아산만 전투와 청군 주둔지의 방어선으로 육상전투가 발발한 성환전투를 통해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장식한다. 긴 역사 속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던 중국이 무너지는 순간이자,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은 남의 나라 간의 전쟁이면서도 막상 전쟁터는 조선 땅이요 조선의 앞바다였다. 아산에 주둔했던 청국 군대를 먹이고, 그들의 군마를 챙기는 것은 아산지역 백성의 몫이어서 허리가 휘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또 다시 일본군을 챙겨야 했기에 아산의 백성들이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가 이기고 누가 패하였든 우리는 그 승리와 패배를 기념하기에는 국운이 초라했고 비굴한 시간일 뿐이었다.
자연등대처럼 뭍에 다다르기 전 서기로 반짝이던 영모바위의 꼿꼿한 모습은 남의 나라에 와서 서로 먹잇감을 두고 싸우는 맹수들을 코앞에서 바라봐야 했던 치욕의 역사로 남았다. 청나라 군사 삼천 명이 백석포 앞바다에 도착하면 영인의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일일이 둘러업고 종아리까지 푹푹 빠지는 뻘을 지나 상륙시켰다고 한다. 설사 아산의 구세주가 왔다고 해도, 어찌 삼천 명을 업고 갯벌을 가로질러 나를 수 있을까? 이제 포성이 멎고 비명이 잦아든 이 바다는 한반도의 미래를 열어갈 희망의 바다가 되었고, 중국 대륙과의 터널을 개통한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온다. 거대한 화물선 사이에서 마치 암초처럼 조심해야 할 돌로 인식될 수 있지만, 청일전쟁 불망탑처럼 바다 가운데에서 역사적 교훈을 알려주는 영모바위를 기억했으면 한다. <저작권자 ⓒ 아산미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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